나와 생수의 이야기 └ 일상의발견



나는 목이 말랐다. 그래서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왔다. 내가 가는 곳은 '상품'들을 파는 시장이다. 나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피폐하고 흐릿한 중독자들의 비틀거림을 지나 내 걸음이 당도한 곳은 어느 마켓이었다. 슈퍼마켓.

그 안으로 들어가면 맨 처음 맞이하게 되는 것은 정육점의 핑크빛 아래 벌거벗은 채로 누워있는 상품들이다. 상품들은 저마다 포즈를 취한 채, 자신을 사줄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다음 코너에는 투명 비닐 옷을 입은 상품들이 있다. 가끔 그 꼴에 헛웃음이 난다. 그 놈이 그 놈이거든. 다른 점이라면, 이것은 각자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다. 포장한 것이다. 뭐, 투명 비닐 옷을 입은 녀석들은 벗겨먹는 재미가 있으니 다르다고 해도 되려나.

잡 생각은 그만 두고, 나는 갈증을 해소하길 원한다. 목구멍 깊숙이, 마음 속 깊은 곳 까지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하길 원한다. 상품, 나는 상품을 원한다. 다음 코너로 걸음을 옮기자 형광등 불빛 아래 조숙히 자리를 잡은 조그만 낯선 아이가 보였다. '에비앙', 이름이 '에비앙'이라고 했다. 크기는 500ml, 미네랄 포함. 500ml, 미네랄 포함. 나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훑는다. 낯선 용모를 보아하니 이 나라에서 온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외국애다.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든다. 신선한 바람. 이거야. 나는 '에비앙'의 몸통을 덥썩 잡았다.

사-르르.

녀석이 입고 있던 옷이 벗겨졌다. 음란한 녀석, 일부러 단추를 풀고 있던 거냐. 녀석의 영롱한 몸매가 내 시선을 압도한다. 잇다가 더 격렬하게 마셔주고 싶다. 마음 속에 숨겨뒀던 악랄한 세포들이 반응한다. 녀석을 마구 괴롭히고 싶었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에비앙'의 몸통을 덥썩 잡은 채, 그대로 계산하는 곳으로 갔다.

"1700원." 나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상품 가치에 비해 너무 비싼 것 아냐?" 그러자 주인은 카운터를 툭 치며 말했다. "외국놈이야, 밀수하는 것도 힘든데, 비싼 건 비싼 거야." 그 말에, 나는 투덜대며 값을 지불한다.

...

집에 왔다.

녀석을 책상 위에 안혀놨다. 나는 말한다, "너의 미네랄을 빨아보고 싶다." 녀석은 기대하는 듯, 불안하는 듯 초조해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멀뚱멀뚱 나를 보고만 있다. '이 녀석, 처음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녀석의 몸통을 붙잡는다. 녀석의 물이 쉽게 빼지는 것을 막는 정조대 마개를 돌려 연다. 잘 열리지 않자, 힘껏 돌린다!

드드득!

'힉' 하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의 신음이다. 겁을 잔뜩 먹은 것 같다. 긴장한 것 같다. 녀석의 몸체에 상처들이 보였다. 관리자들이 거칠게 관리했구나. 이 녀석도 이렇게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닐텐데, 분명히 나와 같은 신분에서 태어났다면... 갑작스런 연민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증을 해소하려고 산 내 돈을 쉬이 버리긴 싫었다. 그저 이대로 강제로 해소해버려서 상처를 받는 게 싫었다. 뭔가 미안하잖아.

나는 녀석의 사출구에 입을 댔다. 천천히 빨아준다. 녀석이 꼴깍대며 침을 삼킨다. 나는 녀석의 사출구를 세심하게 햝으며 녀석의 미네랄을 마셨다. 어느 정도 마셨을까, 입을 뗐다. '푸하!' '에비앙'도 거칠게 요동친다. 처음 느껴보는 것일거다. 온몸이 흔들리고 떨리겠지. 알아. 나는 다시 마개를 닫고, 녀석을 책상 위에 앉혀놓은 상태로 내 일을 했다.

녀석이 조심스레 한 자씩 짚어가며 묻는다. "뭐 하는 거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필요도 없으니까.
녀석이 다시 조심히 묻는다. "나 안 먹어요?"

그 말에 키보드에 손을 뗐다. 나는 녀석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럼 마셔줘?" 그 말에 녀석이 갑자기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려운 눈빛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느낌. 그 찰나의 순간을 지켜보다 나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마실 거야."
"어차피 버려질 것, 제 운명을 빨리 끝내줘요."
"천천히 마실 거라니까."
"때가 되면 당신도 날 버리겠죠, 내 친구들처럼"

나는 심기가 거슬려서 에비앙을 쏘아 보았다. 아까의 그 눈빛을 유지한 채, 녀석은 영혼없이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빨리 끝내줄까." 에비앙은 가만히 있는다. 고개 끄덕거림도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저 책상 위에 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천천히 조심히 보내는 것보단 빨리 끝내주는 게 이 녀석에게 좋은 것일지도 몰라.'

나는 녀석의 마개를 다시 열었다. 녀석은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나는 그대로 사출구에 입을 댄다. 거칠게 자극한다. 손의 각도를 올린다. 녀석은 눈물과 땀을 흘리며 반응하고 있다. 나도 눈을 질끈 감는다. 녀석의 모든 것이 나의 몸으로 들어온다. 머리가 하얘진다...

정신을 차려보자, 녀석은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갈증은 가졌다. 하지만 묘한 공허함이 남았다. 어느새 나도 허무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관계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수많은 놈들을 사고, 먹고, 보냈다. 녀석들은 길바닥이나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겠지. 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그렇게 보내버린 걸까. 내 갈증과 배고픔을 해소해보겠다고, 그 얼마나...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정말 에비앙이니?"
녀석은 말했다. "제 이름은 식별코드로 말해요."
나는 말했다. "빌, 니 이름을 빌로 할게."

녀석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갑자기 이름을 지어주니까. 너와 같은 모든 운명들은 사용되고 버려지는 게 전부고 그럴 거라고 배워왔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낸다. 녀석은 의미불명의 나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녀석의 열린 마개 안으로 우유를 채워 넣는다.

'으읏!'

빌이 반응한다. 물건에게 이름을 지어주니 좀 이상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빌은 새로운 느낌에 정신을 잃는 듯 하다. 녀석의 내장 속의 우유가 너무 격렬하게 출렁거린다. 나는 우유 따르기를 멈춘다. 빌은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얼 하냐는 물음이 눈빛에 담겨있다. 나는 조용히 미소짓는다.

"나는 빌,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넌 이제부터 내 우유통이다."

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계속 우유를 담는다. 빌은 다시 그 느낌이 이상한 듯 움찔 거리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달관한 허무한 미소보다, 그저 정말 무엇인가가 채워진 듯한 미소. 빌은 나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만족스런 미소로. 나도 미소 지었다. 내 마음 속 허무함도 그렇게 채워지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일터로 빌을 데려갔다. 사무실 사람들이 빌을 보고 놀랐다. "뭐야? 너 이거 안 버리고 가지고 다녀?", "취향 참 괴랄하네." 어떤 여자가 안경을 검지으로 치켜며 말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 주변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녀석과 나는 함께니까, 함께라서 더는 허무하지 않으니까.








Ps.
노파심에 쓰는 진짜 이야기:
1. 슈퍼마켓에 가서 마시고 싶은 생수를 잡았는데, 라벨이 벗겨지더라.
2. 아무튼 그냥 그걸 샀고, 집에서 컴터를 하며 마셨다.
3. 마시고 나서 통 버리기 아까워서 거기에 우유를 담아 마셨다.
4. 빈 생수통을 텀블러처럼 쓰는 거 보고 주변인들이 경악함.

Ps2.
저는 제가 허무하다고 물건을 인격체로 다룬다던가 그러지 않습니다. 사물에게서 말소리가 들린다던가 그러지도 않습니다. 텀블러를 버리고 난 후라 대체품이 필요하기도 했고, 통 버리기 아까워서 재활용한 거죠. 이후에 텀블러 사고나서 생수통 버렸음. 이게 현실임.

덧글

  • Megane 2018/02/27 15:44 #

    뭐 빈 생수병 재활용하는 거야 사용하는 사람 마음인데 뭐 어쩌라고...=3=
    저는 빈 페트병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허허허.
  • 로그온티어 2018/02/27 19:02 #

    이런 글을 읽고 멀쩡하시다니 항마력이 출중하시군요
  • G-32호 2018/03/01 15:07 #

    야해..
  • 로그온티어 2018/03/01 16:53 #

    이 글을 야하게 보셨다면,
    님은 앞으로 생수통을 멀쩡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힘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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