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스 피크] "사랑의 증명" └ 액션/모험



이 영화는 상당히 단순한, 90년대 헐리웃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입니다. 연출도 뻔하고, 내용도 뻔해요. 가족주의! 로맨스! 아찔한 스릴과 납득가지 않는 개연성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멋있고 스릴있는 씬들로 가득합니다.

게다가, 지금 보아서는 좀 날림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창밖을 바라보는 레이첼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히 화산 폭발씬에 레이첼을 오버랩만 시킨 CG는 좀 어색하고 임팩트도 약하거든요. 더불어 화산폭발의 위엄과 충격은 [2012]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준 바가 있어서, 오늘날 [단테스 피크]를 보면 좀 약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테스 피크]의 매력은 PG-13탓에 직접적 표현보다 상상에 맡기도록 연출하게 만든 영리함에 있습니다. 불안함을 심어두는 전개로 성인 타겟 영화에 못지 않은 스릴을 느끼게 하는 방식을 쓰기도 합니다. 위에 썼듯이, 흔한 헐리웃 영화의 뜸들이기도 있지만, 실제 일어난 사건과 고증 (+CG) 을 섞어낸 재앙을 통해서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씬들도 있습니다. 덕분에 직접적 고어도는 없지만 잔인해보이는 장면들이 등장하죠. 이는 경쟁작이었던 [볼케이노]에서도 드러나는 장점입니다. 집벽을 녹이며 다가오는 용암과 산성강, 갑자기 온도가 솟으며 살을 익히는 지옥온천까지... 호러적 요소들이 은근히 산재해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볼케이노]보다 [단테스 피크]를 좋게 평가하는데요. 왜냐하면 따스함과 서늘한 감정의 대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초반부의 마을의 정결하고 따스한 분위기와, 나중에 화산폭발로 황폐화되고 차가워지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초반부는 도시생활에 잊은 평화로움을 찾고 싶은 도시인들의 로망을 자극하고, 재앙이 시작되서는 재와 같은 차가운... 현실에서 보기 드물지만 인상적인 색감으로 칠해서 맛있는 화면빨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단테스 피크]를 보면서, 약간 신화적이거나 꿈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화면빨 뿐 아니라,
의미심장함을 내포한 각본 때문이죠.

[단테스 피크]의 시작은 화산학자인 주인공 해리가 애인을 잃는 것부터 시작하고, 결말은 해리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음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자연에서 시작되지만, 해리가 이 문제에서 레이첼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가족들을 구해냅니다. [터미네이터2]의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였던 린다 해밀턴은 여기서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합니다. 모든 일은 007이 다 해먹어요.

게다가 이 장면은 무능력한 정부에 대한 클리셰를 깨는 듯 하지만 고대로 담습하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린다 해밀턴이 나왔으니 보통 무능력한 시장으로 나오진 않을거야! 란 기대를 철저히 부수고, 그녀는 영화에서 간담회 여는 것 빼고는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거든요.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영화를 2~3번 가량 보면 답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전체는 해리를 향한 시험, 시련이기 때문이죠.

영화를 보면 해리는 결혼할 뻔한, 정말 사랑했던 여인이 한명 있었습니다. 다만, 그녀는 죽었어요. 그리고 4년 뒤에 해리는 새로운 여성이자 시장인 레이첼을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죠. 해리는 이전 애인을 정말 사랑했었습니다. 그녀가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빨리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란 의문과 죄책감이 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해리와 레이첼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할 때, 클리셰처럼 그녀 아들이 물 좀 가져다 달라고 말합니다. 곧이어 레이첼이 물을 틀자 아황산 그득한 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해리에겐 일거리가 늘어버리죠. 그리고 그 다음은 알림회와 동시에 화산폭발로 이어집니다...

즉, 해리와 레이첼이 썸씽이 있을까 할 때 우연찮게 화산이 폭발한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재난 상황으로 이어지는데, 모든 리스크를 떠안고 해결하는 해결사는 해리가 됩니다. 운전도 해리가 해요. 생각해보니, 해리는 레이첼의 갑갑한 시어머니도 만납니다. 시어머니의 유언도 듣고요. 도망치듯 들어오긴 했지만, 레이첼의 아들의 아지트도 방문하게 됩니다. 마지막은 해리가 팔 부러지면서 까지 E.L.F를 붙잡으면서 레이첼 가족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맺으며, 해리는 레이첼 가족과 함께할 마지막 시험을 해냅니다.

즉, 영화 속 모든 여정은, 해리가 어떤 역경 속에서도 레이첼 가족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지킬 자격이 되는 사람인가에 대한 거대한 테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이첼이 이 시험에 들지 않은 이유는, 레이첼의 옛애인인 브라이언이 쌍놈이었고, 브라이언이 자의적으로 레이첼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리는 연정이 사라지지 않은 옛애인과 생이별을 했기에 애매하니까, 이런 시련에 들게 된 것이죠.

덤으로 시어머니 말인데,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하셨을 겁니다. 애들이 시어머니를 구하러 갔지만 결국 시어머니는 죽었으니 말짱 도로묵, 고생만 실컷한 것 아닐까? 하지만 감성적으로 보자면, 시어머니(아이들에겐 할머니)를 구하는 여정은 의미있는 여정입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자기 희생을 통해 가족을 구함으로써, 진심과 속죄를 할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실리적으로 보자면 얼토당토않는 씬이지만, 감성적으로 보자면 나쁘지 않은 의미를 지닌 씬이 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화는 재난영화를 넘어서, 꿈 내용 같아 집니다. CG를 써서 어디에도 없을 마을의 전경을 만든 점이 꿈같은 느낌을 가속시키는 바가 있습니다. 분명히 영화의 내용은 흔한 헐리웃 영화의 각본대로 흐르지만, 상황이 일어나는 타이밍이 위에 썼듯이 해리의 기분적 순간들과 기이할 정도로 맞닿아 있기 때문에 헨리의 내면적 여정의 느낌이 나고, 신화적인 느낌이 드는 감이 있습니다. 신화가 덧붙여진 이유는, 신화 또한 논리보다 무의식을 자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미국은 그렇게 개방적이고 방탕한 나라는 아닙니다. 선을 그은 곳 너머엔 청교도적 본능이 있고, 조선시대급은 아니지만, 이 사람들도 뭔가 보수적인 게 있어요. 그래서 헨리의 시련과 [단테스 피크]의 재난은 보수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때, 불건전해 보이는 사랑에 대한 철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헨리는 그걸 이겨냈고 자신을 증명하면서, 결국 화산도 활동을 멈춘 것은, 결국 보수적인 시선에게서 자신의 사랑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될 지 모릅니다.

이것은 정설은 아니고 제 생각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어요.





이제 서사 말고 연출 얘기를 해보죠.

연출은 진짜 헐리웃 스타일입니다. 지루할 까봐 여러 짧은 컷씬을 연속시켜서 정신없게 만들고 웅장하고 긴박한 그 시절의 뻔한 오케스트라 BGM을 쏟아붓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저는 이렇게 강조하는 재앙보다는 '현실적으로' 밀려드는 재앙을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그냥 롱테이크로 재앙의 모든 참상을 담아내고 재앙이 주인공에게 서서히 밀려드는 과정을 찍어내는 걸 좋아해요.

특히 주인공이 단순히 [단테스 피크]의 전경을 바라보는데 웅장한 BGM이 흐르는 건 너무했다 싶었습니다. 자꾸 일상파트에서도 웅장한 오케스트라 BGM을 틀어대는 게 안 맞고, 이상해요. 생각해보면, 그래서 신화적인 느낌이 들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강조적 연출은 이제 보기 힘들어요. [더 와이어] 이후에 뻔하고 후지다고 연출방식의 90%가 바뀌었으니까요. 그 10% 중에 5%가 MTV스타일이고(...) 특히 위기의 순간을 대각선으로 찍어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대각선이 긴장감을 유발하는 것이니, 대각선으로 화면을 틀면 위태로워 보여서 긴장감이 들겠지~! 라는 그 단순한 생각들... 거기에 대사를 씹으며 강조하는 그 말투들까지.

이렇게 뭔가 강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만들어낸 장면들은 말초적이고 기초적이지만, 또 그 노골성이 너무 그리웠고 좋았습니다. 지금에서도 가끔 이런 영화들이 나오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보통의 21세기 영화는 밀당을 하거나 의도를 숨기거나 알고보니 이런거였다라는... 어떻게 하면 세련되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관객과 지능싸움을 하는 형태로 옮겨왔지만 이때는 단순했으니까. [블레이드러너2049]의 데커드의 말처럼 "왤케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라고 호통치고 싶어도 그리움은 그리움일 뿐입니다. 저도 [더 와이어]식 연출 맛보고 이전의 노골적인 연출에서 등을 돌렸으니까요.

그래서 이 영화가 좋냐 안 좋냐를 말한다면...
뭐, 90년대를 기억하는 분들께는 좋지 않겠습니까. 말에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 딴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