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치라이트 └ RPG

"작품에 있어 정공법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작품을 말할 때, 사사로운 것을 제외하고 장르성 하나에 집중하는 작품이 보이면 정공법으로 밀어붙였다고 쓰곤 한다. 어떤 기교도, 어떤 변주도 없이, '그 장르'라면 먼저 떠오를 만한 장면들이... 그것만 나오는 작품. 그러니까 장르의 클리셰, 딱 그걸 보여주는 작품.

어떤 리뷰어는 이런 작품을 독창적이지 않다고 비평하는 편이다. 사실 이 게임 나올 당시엔 나는 독창성을 중시하던 때였다. 그래서 이미 있는 작품을 또 만들어 뭐하냐는 생각에, 이 작품을 무시했었다. 디아블로와 같은 핵앤슬래시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나는 이미 디아블로1을 즐겼고, 다크스톤도 즐겼고, 포가튼렐름식으로 다시 재해석한 네버윈터나이츠에, 살짝 비꼰 데스스팽크에, 사이버펑크 딱지를 붙인 리스트릭트 에어리어에, 독특한 세계관을 붙인 레버넌트에, 디아블로의 증조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건틀렛에...너무 길이 길어지니 언급하지 않은 것만하면 이미 많이 묵었는 지라 안 한거다. 그나마 그런 게임들은 자기만의 변주와 개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원 개발자들이 아예 설계 그대로 만든 게임을 또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근데.. 실은, 정말 큰 의미가 있다.

[토치라이트]는 디아블로1을 현재의 컴퓨터 시스템으로 불러왔을 뿐 아니라, 그 특성을 고대로 살리면서, 편의성을 극대화시켰다. 규모도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디아블로1의 것으로 간다. 디아블로2처럼 엄청난 확장을 시키기 전, 마을 하나와 던전에서 시작하고 거기서 끝나는 미니멀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딱 그 정도. 허나 거기서 내적인 확장을 시켰다. 좁은 땅덩어리를 잘 활용해 만든 건축물처럼 작지만 많은 것이 들어가 있다. 디아블로1을 지금 플레이하면 지루하고, 별 거 없고, 부분적으로 불편한 것들이 많은데, 그걸 싸그리 개선한 게 [토치라이트]다. 개발자들이 모여 만든 업데이트 모드같은 거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저 게임은 디아블로1의 개발자들이 모여 만든 디아블로1에 대한 업데이트 모드같은 거다. 만일 저작권 문제가 없었다면 이 게임의 이름은 "디아블로 원"이라는 깔끔하고 간지나는 이름이 되었을 지도 몰라. 스팀펑크 스킨 확 벗겨내고 다시 악마를 불러냈을 거다. 내 기억에, 악마를 불러낸 게임 대다수는 좋은 게임이었다. 이상하게 그렇더라고. 악마를 부른 포스탈2도?

또 내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 저 게임은 누구라도 잡으면 아 이거군! 하고 바로 알 게임이다. 복잡하다거나 그딴 건 하나도 없이, 뺄 건 과감히 다 빼버리고 하나를 향해 달려가는 게임이니까. 이것이 정공법이란거다. 이것이 고전 작품에 대한 '업데이트'란 것이고. 동시에 프로란 무엇인가를 실감하게 만든다. 노파심에 쓰지만, 나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격을 다르게 보지 않는다. 프로란 어떤 표현을 정말 효과적으로 잘 만드는 것에 가까운 크리에이터고, 아마추어는 규격과 약속을 깨면서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을 만드는 쪽에 가까운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하기 떄문. 그렇기에, 어떤 메소드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토치라이트]의 개발자들은 프로다. 그들은 이 장르에서 유저들이 어떤 것을 원할 지를 안다. 그리고 딱 그것만 만드는 게 아니라, 이것도 너네가 좋아할 거아, 좋아하던 거야라며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매우 profit했고, 디아블로 팬 유저들은 매우 행복하게 2010년을 보냈겠지. 8년 후에 자기들이 뭔 일을 겪을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왠지 게임 설명보다 여러 잡담이 길어졌는데, 말했듯이 이 게임은 디아블로1이니까
더 설명할 게 없다.

쏟아지는 몹들을 마구잡이로 잡는다, 체크
3개 단축키와 마우스 하나로 즐기는 편의성, 체크
마법, 레어, 세트, 랜덤뽑기, 강화. 체크
기동성을 더하는 포탈 시스템, 체크
방어 밸런스와 공격 밸런스, 체크
한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던전, 체크
D&D 주사위놀음은 개나줘버려, 랜덤박스빼고 체크
3개 클래스, 체크
스타워즈 스크롤 방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스토리, 체크
동물학대, 체크
기존의 던전만으로는 분량감이 부족할 것 같이 느껴지니까 만들었으나 어차피 비슷한 구성이라서 별로 분량이 더해졌다거나 다채로운 느낌도 들지 않는 혹같은 존재감이 일품인 인스턴트 던전과 서브 던전, 체크
시간을 낚는 낚시요소, 체크

끝.

4개 아이템 합성하는 건 검색해봐도 저게 대체 뭔 지랄인지 몰라서 설명에서 뺌.







PS.
또 디아블로 얘기 나오니 말인데. 지난 얘기긴 합니다만, 또 m이야기를 꺼내야 겠어요.

블리자드가 디아블로m만든다고 날뛰는 유저들을 보면서 처음에 즐거워했어요. 언제나 남의 집 불구경이 재밌거든요. 사실 언제 병크내나 기다리기도 했었고 말이지. 잘나가는 회사와 그 신앙적인 팬덤 꼴을 못 보는 비뚤어진 심성 캡콤과 코나미, 유비소프트, 에이도스...기타 등등 회사를 빨다가 배신감을 느끼고 탈덕하는 과정을 자주 겪은 게이머로서 별 지랄을 다봐서 놀랍지는 않았기도 했고.

패스 오브 엑자일, 빅터 브란, 그림 던을 만든 사람들 보면 굳이 블리자드가 아니어도 탑-다운 핵앤슬래시를 잘 만들 사람들은 세상에 널려있다고 봅니다. 장인이라는 믿음 하나로 블리자드를 빨아왔던 것 뿐이지, 장인은 블리자드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고착화된 것이 싫거나 만들고 싶은 걸 만들고 싶어서 회사 뛰쳐나와 만드는 장인들도 있듯이, 재야의 장인도 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대단한 것을 잘 느끼지 않으려 하는 거죠. 어떤 것이 폭발적 흥행을 했다하면 의심하면서, 불안해해요. 저게 과연 정말 진심을 다해 만든 걸까? 왜냐하면 때로는 진심을 다해 만들지 않아도,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에 그 게임이 딱 맞아 떨어져서 성공하는 케이스도 있거든요. 자기 가진 가치보다 더 크게 흥행해버려서, 오만함에 다음 작품 만들지만 그땐 붐이 끝나버려서 본질이 드러나 버리고, 곧바로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물론 주기적인 역량을 가졌고 그게 시기와 맞아 떨어져서 폭발하는 경우도 있고, 그 경우엔 계속 보증할만한 작품을 내놓긴 합니다만... 제 불안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늘 성실하고 늘 이해심넘치고, 늘 현명하고 늘 뚝심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렇다 해도 게임은 혼자 만들고 혼자 퍼블리싱하고 혼자 게임개발을 푸시하는 게 아니라서 협의과정에서 신념이 비틀릴 수도 있어요.

니체의 초인이야기를 대충 내 식으로 해석한 건데,
저는 초인을 자기 욕망이나 주변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택하는 미친놈들로 간주합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그들을 자신들의 속을 긁어줄 신념을 가진 초인으로 본 거에요.
근데 안타깝게도 당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랐던 방향의 초인이었던거죠. 혹은 그들은 초인이 아니었거나.
그래서 쟤들이 초인이 아니래! 신념 없는 놈들! 이라고 욕하면 뭐하나요
본인도 초인이지 못하면서 남은 영원히 그래줄거라 믿었으니
그것도 남만 욕하는 건 좀 이기적이었던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또 개돼지 까는 병신글처럼 들릴 거라는 거 압니다. 그건 아니에요. 신념 강한 사람들 뭉쳐 있는 거 봤다면 병신글처럼 보기보다 이 글이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겁니다. 백퍼 싸우고 지들끼리 와해되거든요. 그 말은 즉슨, 이 세상 사람들이 신념과 정의감이 강한 이들만 모여있었다면 그 사회가 정말 정의감 넘치고 긍정적인 사회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서로 싸우겠죠. 제 생각에 타협보고 마냥 신나서 아무렇게나 도장찍어 버리는 사람이 존재하니까 이 세상이 훨씬 평화로운 겁니다.

단지 사람 자체가 이기적이고 개인적이고 자기 선택을 할 뿐인데, 쟤네가 저런 선택했다는 데 그렇게 격렬하게 분뇨하고 한심하게 볼 필요는 없단 말이죠. 그게 자기 즐거울 일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해도 되지만, 그게 아니고 자기 스트레스까지 일으키면서 화가 났다면, 그럴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그냥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마는 거죠. 이건 게임계에서 배신당한 경험으로는 탑인 사람의 조언입니다. 저는 아니고, 좀 해탈하신 분 하나 있었어요. 저는 그분의 복사로서 그분의 말씀 전하는 것일 뿐.

아무튼 저는 이런 혼란스런 시기에서는, 계속 의심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언가 하나가 잘해줄거야라는 믿음이 아니라, 계속 대체제를 찾아야 합니다. 걔네도 오만해지지 않게, 계속 다른 쪽으로 소비하면서 경쟁자를 만들어줘야 하는 겁니다. 휘둘리는 게 아니라 휘두르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내 집을 노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노크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3년 전에 아는 분에게 프로젝트 로스트아크란 이름을 들었을 때 뭔 종교게임이냐고 네이밍 센스에 관해 엄청 비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의미심장했군요. 역시 게임은 시기라니까.







PS.
시기 말인데, 저도 가끔 그걸 느껴요. 게임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 게임이 좋아질 시기가 있어서, 라이브러리에 게임을 쟁여놓고 몇 년을 무시하다가 잡고선 엔딩까지 가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토치라이트]를 몇년만에 잡은 지금 이 것도 그 사례에 포함되는 것이죠. 암튼, 뭐든, 그 게임이 맘에 들 시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