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랭커 └ RPG





이 RPG의 전투 시스템은 턴제가 아닙니다. 초마다 쌓이는 AP를 활용해서 공격타이밍과 방어타이밍과 스킬발동타이밍을 잡아야 하는 게임이며, 포지션을 브레이커로 바꿔서 상대의 방어능력을 깎아 임시 무력상태로 만드는 게 관건입니다. 사실상, 액턴제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난 게임은 아니지만 AP가 충분하다면 연타로 콤보 날릴 수 있는 등의 액션 바리에이션이 충분한 덕택에 액턴제지만 빗뎀업 액션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허나 초기작이자 실험작이라서 그런지, 전투 시스템이 너무 쉽습니다. 파고들기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명확하게 느낄 수 없을 정도에요. 그냥 어느 지점부터는 록맨에서 파트 갈아끼우듯 상대 캐릭터 전략에 따라 스킬 갈아 끼우는 것 밖에 하는 게 없게 됩니다. 심지어 랭커들의 개성이 몰개성인 것도 문제. 중간에 난이도 있는 몇몇 빼고는 그냥 렙업/장비업으로 쓸어버릴 수 있어서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전투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임은 일직선 진행입니다. 퀘스트를 깨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식입니다. 랭크 시스템은 껍데기입니다. 랭크 시스템은 다양한 랭커들과 싸우며 자신의 랭크를 올리는 호전적인 시스템을 약속하는 듯 했지만, 그게 아니라 퀘스트 플래그를 전면에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유저의 랭크에 따라 랭커들과 싸우게 되는 게 아니라, 퀘스트 현황에 따라서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 퀘스트를 수락받지 못하면 싸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스토리상' 지금 싸울 수 있는 랭커들을 찾기 위해 마을을 빙빙 돌아다녀야 하기도 합니다. 랭커들과 싸워서 이기면 랭커가 가진 기술을 흡수하게 되는데, 때로는 록맨처럼 어느 랭커가 가진 기술이 없으면 다음 랭커와 싸워서 이기기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게 절차, 절차, 절차인 셈이죠.

그냥 자유롭게 랭커들과 싸울 수 있고 유저 재량에 따라 숨은 랭커도 찾아 싸울 수 있게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호텔방과 민간저택 돌아다니며 싸울 수 있는 랭커 찾아다니다보면 이 게임의 존재 의의가 뭘까라는 존재론적 회의(?)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했듯이 현재 퀘스트 플래그에 따라 싸울 수 있는 랭커를 모두 찾아 싸우지 못하면 진행이 안되고, 진행이 안되면 랭크를 올릴 수 없어서 더 넓은 장소를 못가거든요.

랭크를 올릴 목적은 확실히 있는데, 올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민이나 선택의 자유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없으니 올리는 과정이 흥미롭지 않습니다. 그냥 랭크를 올린다가 아니라 스토리 떡밥을 찾으러 다니는 것 같아요.

그리고 RPG치고는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강화도 없고, 제작도 없고, 레벨업의 의의도 작은 편이고, 강해짐을 위한 자잘한 잡일거리도, 가치판단 여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던전이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한 던전 내 맵이 2~3개 됩니다. 길도 어렵지 않고 숨은 요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던전 구성도 길, 적,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 정말 던전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즉, 볼륨이 정말 작아요;

말하자면, 매우 공무원스러운 게임입니다. 보기엔 정말 지루하죠. 근데 이 사람이 갑자기 전투 트리거가 발동되면 입고 있던 양복을 찢고선 단테가 됩니다(?) 문제는 그 전투 트리거가 발동되기까지의 드라마나 과정이 너무 지루하단 게 문제인 겁니다.